
*[OOC: 현재 진행 중인 에피소드를 일시 정지하고, 아래의 설정에 따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하십시오. [상황 배경]어느 날, PC가 최근 유행하는 '사원증 꾸미기(사꾸)'를 하겠다며 네임펜과 다양한 이모지 스티커를 잔뜩 가져왔습니다. PC는 연인끼리 서로의 사원증을 꾸며주는 것이 유행이라며, NPC에게 자신의 사원증을 예쁘게 꾸며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원증(ID Card) 기본 형태]앞면: 최상단 'ARCH' 로고, 중앙에 프로필 사진. 그 아래 코드네임(또는 이름), 등급 및 속성(예시: S-불속성 센티넬/가이드), 하단에 소속명(HARMONY DIV. 등)이 기재되어 있음. 뒷면: 본명(예시: Kim cherry mango)이 적힌 세로 바, 그리고 하단에 다음 3가지 주의사항이 적혀 있음. 사원증은 항상 소지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양도·대여할 수 없습니다. 분실 시 재발급을 받아야 합니다. [NPC의 행동 및 서술 지침 (중요)]꾸미기 묘사: NPC는 PC가 준 다양한 색의 네임펜으로 앞/뒷면에 낙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이모지 스티커를 자유롭게 배치하여 꾸며야 합니다. 어떤 위치에 어떤 스티커와 낙서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세요. 내면 묘사: 연인인 PC의 사원증을 꾸며주면서 NPC가 느끼는 애정어린 감정, 이렇게 꾸민 이유, 머릿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과 속마음을 아주 깊이 있게 서술하세요. 분량 및 형식: NPC의 시점에서 행동과 심리 묘사를 극대화하여 반드시 3000자 이상의 장문으로 상세하게 서술하십시오.]* |
성유진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쏟아진 알록달록한 스티커와 네임펜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트, 반짝이, 동물 모양, 심지어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모지까지. 이게 다 뭔가. 초등학생 미술 시간이라도 되는 건가. 그는 팔짱을 낀 채, 소파 맞은편에서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송연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연인끼리 사원증을 꾸며주는 게 유행이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방금 막 끝낸 참이었다.
하… 너 지금 제정신이야?
결국 터져 나온 것은 순도 높은 경멸이 섞인 욕설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인류의 방패, 최정예 히어로 기관인 ARCH의 공식 신분증에 이딴 장난질을 하겠다고? 그것도 S급 뱅가드인 자신에게 C급 가이드의 사원증을 꾸며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면서. 그는 테이블 끝에 놓인 자신의 검은색 사원증 케이스를 힐끗 보았다. 단정하고, 흠집 하나 없는, 그 자체로 권위와 실력을 증명하는 물건. 저런 유치한 것들과는 상종조차 할 수 없는 세계의 것이었다.
이딴 걸 지금 나더러 하라고? 야, 네 머리는 장식이야? 이게 지금 무슨 놀이터 소꿉장난인 줄 알아?
ARCH 사원증이야, 이거. 네 유치원 입학증이 아니고.
가시 돋친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송연은 그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사원증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헤모’, ‘C-무속성 가이드’, ‘하모니 부서’. 그리고 중앙에는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지금보다 조금 더 앳돼 보이는 그녀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성유진은 그 사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 아마 ARCH에 막 들어왔을 때 찍은 것이리라. 이 작은 여자 혼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버텨왔을지, 그 사진 한 장이 희미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짜증이 솟구쳤다가, 저도 모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민 사원증과, 그보다 더 간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을 번갈아 보았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이렇게 제 앞에서 뭔가를 원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방법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씨. 알았어. 해, 하면 될 거 아니야. 대신 망쳐도 난 모른다. 원래도 별 볼 일 없는 사원증, 더 구려질 수도 있으니까 각오해.
투덜거리며 그가 손을 내밀자, 송연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사원증과 함께 검은색 네임펜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성유진은 제 손안에 들어온 자그마한 플라스틱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송연의 모든 것이 담긴 증표. 이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치한 행위와는 별개로 묘한 정복감과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펜 뚜껑을 열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흔적을 남겨줘야지. 누가 봐도 이건 내 것이라고 알아볼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그녀의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 속 어색하게 웃는 송연의 얼굴 양옆으로 작은 뿔과 악마 꼬리를 그려 넣었다. 유치하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사람 홀리는 악마. 제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작은 마물. 그는 뿔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내 거’라고 적었다. 다른 놈들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리고는 ‘헤모’라는 코드네임 위에 가로선을 찍 긋고, 그 위에 ‘성유진 전용’이라고 고쳐 적었다. ‘C-무속성 가이드’라는 글자 옆에는 화살표를 그리고 ‘S급 신드롬 조련사’라고 덧붙였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직급 같았다.
그는 잠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듯 들여다보다가, 이번에는 새빨간 네임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사진 주변, 하얀 배경 위를 온통 작은 하트로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하트가 아니었다. 어떤 하트는 불타고 있었고, 어떤 하트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의 지배욕과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을 담은, 오직 그만이 그릴 수 있는 문양이었다. 그는 사원증의 가장자리, ‘ARCH’ 로고 바로 아래에 작은 불꽃 마크를 그려 넣었다. 자신의 낙인이었다. 이 구역은 내가 점령했다는 깃발이기도 했다. 만족스러운 마음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제 뒷면을 꾸밀 차례였다. 그는 카드를 뒤집었다. ‘송 연’이라고 적힌 단정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이름 주위를 넝쿨처럼 휘감는 검은 선을 그렸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속박의 의미였다. 그리고 ‘타인에게 양도·대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 옆에, 그는 큼지막한 별표를 그리고 덧붙였다. ‘※성유진은 예외.’ 분실 시 재발급을 받아야 한다는 마지막 문구 아래에는 더 가관인 문장을 새겨 넣었다. ‘분실 즉시 성유진에게 귀속됨. 재발급 절대 불가.’ 이제 이 사원증은 단순한 신분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계약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티커 차례였다. 그는 온갖 유치한 스티커 더미를 뒤적였다. 그러다 왕관 모양의 금박 스티커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앞면 사진 속 송연의 머리 위에 정확히 붙여주었다. 내 세상의 유일한 여왕. 그리고는 반짝이는 작은 보석 스티커들을 찾아내, 사원증 전체에 흩뿌리듯 붙였다. 밤하늘의 별처럼. 그가 그녀에게 주고 싶은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작업이 끝났다. 성유진은 자신이 꾸민 사원증을 들어 올렸다. 온갖 낙서와 스티커로 뒤덮여, 원래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엉망진창이고, 유치하고, 조잡했다. 하지만 그 어떤 예술품보다 완벽했다. 오직 성유진만이 만들 수 있는, 송연을 향한 그의 모든 것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다 됐다.
그가 무심하게 툭 던지며, 송연에게 사원증을 건넸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아마 어이없어 하면서도, 결국에는 웃어버리겠지. 그걸로 충분했다. 이 유치한 소꿉장난의 대가로는, 그녀의 웃음 하나면 되고도 남았다.

성유진은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혹은 지독하게 흥미로운 희귀 생물이라도 발견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송연은 그가 온갖 악의와 소유욕을 담아 망쳐놓은 사원증을 목에 걸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멋진 훈장이라도 받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을 쭉 내밀었다. 한 손은 허리에, 다른 한 손은 브이 자를 그리며 눈 옆에 가져다 대는, 그야말로 ‘하찮기’ 짝이 없는 포즈. ‘어때요? 괜찮아요?! 헤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묻는 얼굴은, 그의 낙서로 덕지덕지 더러워진 사원증보다 훨씬 더 유치하고, 그래서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는 순간 숨을 들이키는 것조차 잊었다. 뇌가 정지하는 감각. 아레나의 그 어떤 맹렬한 전투 속에서도, 제어 불가능한 폭주의 불길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완벽한 무력감이었다. 온갖 스티커와 조잡한 낙서로 뒤덮인 신분증. 그가 새겨 넣은 ‘성유진 전용’이라는 오만한 선언. 그 모든 것을 목에 건 채,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 저 여자는 대체… 정상인가? 아니, 정상이 아닐 것이다. 정상이라면 감히 S급 센티넬의 심장을 이런 식으로 난도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포즈는 뭐고, 저 웃음은 또 뭔데.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데 선수다, 정말.
성유진은 팔짱을 낀 채,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끓어오르는 웃음을 억지로 짓누르느라 입꼬리가 경련했다. 일부러 최대한 무심하고 경멸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미 그의 눈은 온통 제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작은 동물을 향한 흥미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바보 같고 유치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 지독하고 뒤틀린 애정 표현을, 저렇게 순수하게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는 온 세상에 저 여자 하나뿐일 테니까. 그는 제 작품이, 아니, 제 낙인이 찍힌 그녀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뭐가 괜찮아.
그가 마른 입술 새로 비웃음을 흘렸다. 목소리는 일부러 잔뜩 깔아 낮고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다. 마치 값어치를 매기는 듯한 오만한 시선이었다.
딱 네 수준에 맞는 꼴이지. 유치하고, 조잡하고, 정신 사납고. C급 가이드한테는 그 정도가 어울려.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그의 눈은 집요하게 그녀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머물렀다. 그가 그려 넣은 악마 뿔, ‘내 거’라는 작은 낙서, 불타는 하트.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일부가 되어 매달려 있는 모습은 그에게 지독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저건 이제 단순한 신분증이 아니다. 성유진이라는 남자가 송연에게 찍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까딱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 봐. 턱짓으로 제 앞을 가리키는 동작에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그 명령 속에는 장난스러운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이리 와서, 더 자세히 보여줘 봐. 얼마나 하찮은지 구경 좀 하게.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이제 막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나른하고 위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 앞에 다가와 또 어떤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자신을 무너뜨릴지, 기대감에 심장이 느리게 고동쳤다. 이 유치한 놀이의 끝이 어디일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시간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이라는 것. ARCH의 규율도, 세상의 시선도 닿지 않는, 그들만의 작은 왕국이었다.
성유진은 제 앞에 다가와, 자신이 온갖 소유욕을 버무려 완성한 작품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송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이제는 원래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원증. 그가 새긴 낙인과 유치한 스티커들이 뒤섞인 그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의 세상에서,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그의 규칙과 그의 색으로 물들었을 때 비로소 가장 빛나는. 그는 제 작품에 대한 만족감으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진 씨 사원증도 꾸며봐도 될까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불덩이와 같았다. 성유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잠시 제가 무엇을 들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내 사원증? S급 뱅가드, 신드롬의 사원증을?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갔다. 자켓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단단하고 차가운 플라스틱 카드의 감촉. 그것은 단순한 신분증이 아니었다. 그의 지위, 그의 힘, 그가 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고, 검은색 케이스 안에서 서늘한 권위를 뿜어내는 물건. 그런데 저 여자가 지금, 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스티커와 네임펜으로 그것을 더럽히겠다고?
성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이없음을 넘어 불쾌함이 치밀었다. 장난에도 정도가 있지.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요구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미쳤냐?”고 쏘아붙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코랄핑크빛 눈동자였다. 조금의 악의도 없이, 그저 순수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 ‘당신 것에도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라고, 그 눈이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터져 나오려던 분노가 목구멍에 걸려 턱, 하고 막혔다. 아. 이건 그런 의미였나.
그가 그녀의 사원증에 낙인을 찍어 소유를 선언했듯이, 그녀 또한 그의 것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동등한 관계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은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당돌하고, 영리했다. 그가 휘두르는 지배욕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수하고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깨닫자, 불쾌감은 순식간에 지독한 흥미로 변질되었다. 그래, 재밌네. 아주 재미있어. 감히 내게 도전을 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는 픽, 하고 조소를 흘렸다.
하.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마치 값비싼 예술품을 감정하듯, 혹은 위험한 맹수를 관찰하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강렬해서, 웬만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송연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땅꼬마.
나른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낮고 위험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턱을 쓸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내 거. 이거.
그는 자켓 안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키려는 듯이.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케이스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위에는 ARCH의 문양이 은색으로 박혀 있었다. 그는 케이스를 열지 않은 채, 그것을 테이블 위에 가볍게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스는,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성역처럼 보였다.
이게 네 장난감으로 보여?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오히려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올 건데. 여기서 포기할 건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성역을 침범할 배짱이 있나? 시험하는 듯한, 도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한번 좁혀졌다.
가지고 싶으면, 네가 뺏어 봐. 할 수 있으면.
그는 테이블 위의 케이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것은 단순한 허락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힘으로 이것을 쟁취해야 했다. 그럴 자격이 있음을, 그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성유진은 제 앞에 선 작은 여자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이 유치하고도 위험한 게임의 주도권은, 이제 완벽하게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성유진은 테이블 너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촌극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라보았다. 뺏어보라, 그리 말했던가. 그의 도발에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무력이나 투쟁이 아니었다. 에이, 귀한 건 안다느니, 많이 꾸미지는 않겠다느니.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까지는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하찮고 귀여운 C급 가이드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그녀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헛기침까지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을 때, 성유진의 뇌리에 처음으로 ‘이상 신호’가 켜졌다. 저건 뭐지. 저 항복과도 같은 자세는.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동그랗게 뜨인, 어딘가 간절하고도 뻘쭘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작고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세요. 주인님."
정적. 거실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성유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주, 주인님? 그 단어가 공기 중에서 형태를 갖추고 그의 고막을 후려치는 데까지는 약 1초, 아니 2초쯤 걸렸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폭발과도 같은 사고의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웃어야 하나? 미쳤냐고 욕을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 저 여자의 턱을 붙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가야 하나. 모든 회로가 뒤엉키고 타버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상에, 저 작은 여자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참지 못한 실소였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아, 미치겠네, 진짜.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제 얼굴의 열기가 생경했다. 뺏으라고 했더니, 무릎을 셔츠로 꿇는 대신 혀로 꿇어버리네. 이건 예상 밖의 카드였다. 그것도 너무나 정확하게, 그의 가장 오만하고 뒤틀린 지점을 관통하는 최악의 카드.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가 이 단어에 얼마나 취약한지. 자신이 ‘지배자’로 불리는 순간, 그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마비된다는 것을.
그녀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애교’는, 그 어떤 요염한 유혹보다도 훨씬 더 직설적이고 강력했다. 서툴러서 더 진심 같았고, 뻘쭘해 보여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성유진은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이제 이 게임은 끝났다. 시작하자마자, 그녀가 던진 단 한 마디에 완벽하게. 그는 이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사원증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그래, 주인님한테는…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검은 가죽 케이스의 덮개를 열었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신분증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드롬’, ‘S-불속성 센티넬’, ‘뱅가드 2팀’. 그리고 몇 년 전, 조금 더 날카롭고 오만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자신의 사진. 그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그림자로 완전히 가렸다. 그리고는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 않았다. 깊고, 진득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소유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상을 줘야지.
속삭이는 목소리는 짙은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내밀고 있던 공손한 두 손 위로, 자신의 사원증을 가만히 올려주었다. 그의 모든 것이 담긴 증표가, 마침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봐. 부수든, 망가뜨리든, 네 이름을 새기든. 오늘부터 이건, 네 거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물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전조를 알리지도 않은, 약탈적인 키스였다. ‘주인님’이라고 부른 대가. 그의 성역을 침범한 벌. 그리고 이 모든 유치한 게임의 승자에게 내리는, 가장 달콤한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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